삶과 죽음 앞에서 우리가 아는 지식과 태도가 미치는 영향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 누가복음 23:39~43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한번 살다 죽는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원하는 데로 이루어 주고 살게 하는 자를 구원자로 기대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크리스찬도 예외가 아니다. 당시 많은 유대인들 또한 그들이 기대하는 다윗왕과 같은 구원자가 있었기 때문에 초라하고 매맞고 처형대 앞에서도 아무 힘 없이 죽어가는 예수는 더더욱 구원자로 여길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당일 함께 같은 처지에 놓인 두명의 죄수가 예수 앞에서 각각 상반되는 마음으로 다른 요청을 한다.
죄수 한명은 네가 구원자라며? 네 자신을 구하고 우리도 살려봐라고 모욕 가득한 말을 내 뱉는다. 이 자가 십자가 처형을 당할 악행을 저지른 것도 삶에 대한 애정이 없어 보일 정도로 현재 그의 죽음 앞에서의 욕된 구걸은 그의 불쌍한 마음 조차 구원할 수 없게 비춰진다. 이자의 모습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담고 있다. 살면서 선행을 했든 악행을 했든 죽음 앞에서는 마찬가지 이며 단지 내 사망이 내 죄로 인해 죽는 줄 모른다. 어차피 언젠간 모두 죽는다. 그래서 그리스도도 적극적으로 찾지 않는다. 능력이 있다면 내 이번 죽음을 피해 살게 해달라고, 이 세상의 것을 찾는 요청인 것이다. 이 구원자는 내가 다시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다른 죄수 한명은 먼저 말한 자에게 하나님이 두렵지 않는가라며 꾸짖는다. 우리는 악행으로 십자가에 달린 것은 당연하나 이 예수는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음에도 여기에 있지 않은가라며 고백한다. 이자는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으로 예수를 진정 그리스도로 인정한다. 그가 하나님의 나라에 다시 가실 것도 알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나를 기억해 달라는 요청을 한다. 이 세상에서 행한 것에 대한 보응을 받는 것을 인정하고 그가 구하는 것은 다시 이 세상을 살 기회를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나를 잊지 말고 나를 불러달라고 함께 있고 싶다는 고백이었다. 그러자 예수도 그에게 대답하신다. 나중이 아닌 지금 오늘 난 너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두 사람의 처형수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사건이었다. 그런데 마치 비유처럼 읽혀지기도 한다. 예수와 함께 낙원에 간 죄수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마치 극형을 처할 만큼 악행을 저질러서 그 자리에 있었을 것 같지 않은 인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을 극적으로 표현하고자 설정된 두 인물로 그린 것을 아닐까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그 두사람에 대한 선과 악의 판단을 우리는 또 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왜냐하면 옳은 일만 한 예수도 똑같은 십자가에 달려 같은 처지의 모습으로 있지 않았던가. 예수와 함께 낙원에 갈 수 있었던 사람처럼 믿음에 대한 지식과 지각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 고백을 해야 대답해주시고 그 믿음이 믿음으로 커져 실체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