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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생각/QT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 누가복음 22:63~71

예수는 대제사장 가야바 집으로 끌려갔는데 그 집을 지키는 자는 힘없이 끌려온 자를 희롱하고 때리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허용하고 있다. High priest 대제사장은 지금으로 따지면 신부로써 주의 종이며 시민들의 입과 귀, 목소리 역할을 해야하는 자 아닌가? 이 모습은 마치 조폭을 거느리고 있는 기업 총수의 이미지다. 현대에 내가 그리스도라고 칭하는 자가 나타났다고 하자. 그가 이적을 행하고 그의 말이 기록된 바 대로 이루고 있다면 귀기울여볼만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떤 상태인가에 따라 그를 그리스도로 믿거나 아니면 부정하게 될 것이다. 내 마음이 궁핍하고 희망을 찾고 싶을때와 어려움 없이 내가 잘해서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고 있을 때 바라보는 관점은 꽤 다를 것이다.

고대 부터 현대까지 삶은 고되고 고난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그 고난들은 지금 더 많이 갖고 싶고 미래에 풍족하고자 하는 열망들이 빚어낸 현재 마음의 궁핍함 때문이 대부분이다. 질병의 고난 또한 과거에 나쁜 습관과 욕망을 위해 희생되어 온 건강으로 오랫동안 쌓여 지불해야하는 비용인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자신의 고난이 어디서 부터 왔는지 심중을 바라보자. 만약 욕망으로 인한 고난이라면 그리스도 또한 수단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최고 권위자로써 과거 선지자들의 말씀(구약)보다 위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말과 행적이 불편하고 자신의 권위를 백성들로 부터 위협하는 제거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못했다. 심지어 찔림이 있었음에도 이 자아의식 과잉과 인지부조화 때문에 자기 합리화를 통해 예수를 제거하는 것이 옳다라는 판단을 할 수 밖에 없었던거 같다. 그들은 한명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 중 깨어 있는 자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는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일까. 그들 모두 그 상태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어 희생의 약속을 이룰 수 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들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직접 예수에게 듣는 것을 원했다. 그를 신성모독이라는 죄로 처형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무영향력 없는 자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주장한들 무시 했겠지만, 점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있었으니 말씀의 최고권위자로써 위협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다고 찔림 조차 없었을까? 옳고 그름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대로 판단할 수 밖에 없는 상태였을까? 이 상태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누구도 예외가 적용되지 않고 삶의 곳곳 순간순간 아주 작은 일에서 조차도 쉽게 발견되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